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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상 신부 영신수련 에세이] [이냐시오 포커스] 이근상 시몬 신부의 영신수련 에세이 8 - 영신수련과 성경읽기

2021.02
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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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수련과 성경 읽기

 

가을 하늘이 아주 높은 날 팔순 어머니와 점심을 했다. 지하철 역까지 배웅을 하며 엄마에게 물었다. 언제가 제일 기쁘세요? 답이 정말 궁금한 물음은 아니었다. 엄마의 답은 뻔한 것이리라 짐작했다. 동생이나 나, 손주들과의 시간? 하지만 엄마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성경을 읽을 때나는 잠시 멈칫했다. 자식이 신부인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뻔한 대답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엄마의 대답에는 묵직한 진심이 느껴졌다. ‘성경만 있으면 될거 같아말씀을 들으며 엄마가 이곳 저곳에 깨알 같이 적어 놓은 성경 구절들이 떠올랐다. 냉장고에, 화장대에, 식탁에, 현관 옆에 엄마는 곳곳에 성경을 포스트잇해 놓는 분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궁금하였다. ‘성경을 읽는데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엄마는 너무 쉽게 대답하였다. ‘그냥나는 그냥 성경을 읽고 있으면 좋아.’ 나는 잠시 멈추었다. 엄마는 진심이었다. 성경이 그냥 좋다는 엄마의 대답은 내게는 너무나 멀고, 엄마에게는 아주 가까운게 낯설었다. ‘그러게요. 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냥 좋으니까. 구구한 답이 필요하지 않지요나는 맞장구를 쳤다. 엄마는 슬플 때는 슬픈데로 좋고, 기쁠 때면 기쁜 데로 좋다라고 덧붙였다. 엄마에게 성경이란 의미가 알쏭달쏭한 어렵고 먼 글들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엄마에게 성경이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탐구의 대상이 아니었다. 모르면 모르는 채로 같이 있는 것으로 충분한 만남의 대상이었다. 누가 그냥 좋을 때, 그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것이 그리 많이 필요치 않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영신수련은 성경을 끼고 걷는 여정이다. 여기서 성경은 과학책이나 교과서가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에 열려있는 벗에 가깝다. 서로에게 겸손한 벗처럼 성경과 피정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끼어들 여지를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성경은 풀어야할 어떤 암호가 아니라 수다스럽거나 수줍은 이야기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우리는 그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우리의 이야기를 건넨다. 두 이야기는 각자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허우적거리기를 반복한 뒤, 점차 익숙해지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오래 묵은 벗들이 그러하듯 서로의 마음에 결국 남겨지는 것은 나누었던 이야기의 내용보다 그와 내가 삶을 나누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냥 좋았다는 것. 그립다는 것 등등.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성경을 귀하게는 여기기는 하지만 성경을 책으로, 이해의 대상으로 축소요약하곤 한다. 다른 모든 글을 대하는 방식에 더하여 더 열심으로 성경을 자꾸 발가벗겨 기어코 움켜쥐려 한다. 마치 올라서 디디고 서야 하는 높은 산처럼 대한다. 성경 위에 올라서서 그 의미를 낱낱이 깨닫지 못하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안달한다. 움직이지 않는 단단한 사실들, 혹은 모두가 인정하게될 정보를 찾아내려 한다. 이야기 속 허술함이나, 모순, 이도 저도 아닌 한갖 가능성들이란 아무짝에 소용이 없다. 이야기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조차 어떠 어떠한 스펙으로 규정하고 고정시켜 놓고서야 그를 안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글로 굳은 오래된 책인 성경이야 말해 무엇하랴. 살과 피가 있는 사람조차 굳은 책처럼 만나는 세상에서 종이에 박힌 글들의 무리인 성경을 살아있는 살과 피로, 아직 성장하는 이야기로 만난다는 말은 도통 몽상적이다.

 

성모 발현을 주제로한 영화 파티마에서 세상을 대표하는 한 등장인물은 성모발현의 당사자로 오랜 세월 생존하였던 루시아 수녀에게 차가운 사실로 공격한다. 소위 교회의 성인들이 본 환시라든가 그들 몸에 남겨진 상흔들이 진실과 거리가 먼, 환시자 자기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 그는 좋은 예를 들었다. 예수님 당대에 십자가형으로 죄수를 매달 때, 못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박았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의 환시 목격담들은 못자국이 손바닥에 나있다. 한마디로 그 환시나 상흔들은 역사적인 사실과 무관하다는 말. 환시가 아니라 착각이라는 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과테말라에서 발현하신 성모님과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인종도 다르다. 하느님이야 그렇다쳐도 성모님은 처음 그 모습을 유지하시는게 더 진정성이 있는게 아닐까? 이 시대의 진위판별기준에 따르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존재에게 모순이며 가짜다. 시대와 문화를 넘어 우리게 다가온 성경은 그 때 그 순간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채로 우리게 다가온다. 우린 우리의 한계 속에서 손목에 나야 할 못자국을 손바닥에서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감동한다. 사실인즉슨 우린 틀린 정보에 휘들리며 성경을 읽고 있다는 말이다. 성경 읽으며 우린 가짜의 소용돌이 속에서 웃고 울고, 좌절하고 희망하고 있다. 인간은 부단히 노력하여 진실, 그러니까 성경의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려 애를 써왔으나 그러나 그건 결국 지는 싸움. 애초부터 누가 그 옛날로 돌아가 정확한 진실을 목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을 읽으며 그냥 좋은이들에게 성경읽기는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다. 살아 있는 이야기는 과거의 정확한 사실를 움켜쥐는 것과 거의 무관하다.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필요한 것만이 성경을 만날 때도 필요할 뿐이다. 모든 인간의 만남은 사실들, 정보의 교환일 수 없다. 그에 대한 정보를 쌓아서 그를 만날 수는 없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만나야 한다. 그건 앎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앎과 관계가 서로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앎이 관계를 규정할 수는 없다. 앎은 귀하고 소중하지만 앎은 관계의 일부일뿐 전체가 될 수 없다. 손뼉을 치며 손을 맞잡는 순간이 없이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참으로 알 수도, 만날 수도 없다. 영신수련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성경은 그 옛날을 알기위한 정보집이 아니다. 믿는 이들에게 그러하듯,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피정자들에게 성경은 지금도 살아있는 이야기이며 지금도 살아 성장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성경은 자기의 빈자리로 새로운 이들의 이야기가 스며들도록 허술하다. 성경은 겸손하게, 누군가가 성경이라는 이야기가 참여하지 않으면 죽고 마는 것처럼 배가 고픈채 우리를 기다린다.


엄마가 성경과 만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엄마만이겠는가? 진하고 엷게 많은 이들이 성경을 만나왔다. 그 만남은 말로 다 풀어헤쳐질 수 없다. 엄마는 성경과 함께 살아있음을 그냥 좋다고 말하였지만 그 말은 담은 내용보다 담을 수 없는 내용을 가르키고 있었다. 만남은 말보다 늘 더 크다. 믿는 자들은 성경을 만나야 한다. 그건 앎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세계다. 같이 좀 쉴 수 있을 때, 곁에 두고 좋다고 고백할 때, 내 이야기를 성경에게 건넬 때, 그렇게 성경의 이야기에 울고 웃을 때 우리는 성경을 만난다. 영신수련의 성경은 죽어있는 성경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경이다. 손바닥 못자국이나 손목의 못자국은 그 때 예수의 몸에 박힌 못이 지금 읽는 이의 몸에 박히는 만큼 살아있으며 진실이다. 위치야 팔뚝이든 가슴이든 아니면 더 먼 곳이된들 무슨 상관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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