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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포커스] 김상용 도미니코 신부의 수도자 일기 5 - "어느 겸손한 목격자"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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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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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겸손한 목격자 

 

집에 돌아왔다.

 

공동체 2층에 마련된 경당에 먼저 들렀다. 밤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자마자 나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와 주체할 길이 없었다. 감실등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참을 울다가 다리가 저려오자 나는 긴 한숨을 쉬고는 다리를 풀어 기도자세로 고쳐 앉았다. 이제 서서히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마음 안에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 흘린 그 눈물들이 슬픔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살며시 눈을 떠 희미한 감실등 옆에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시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 보였다.

 

지난 2주 동안 나는 여성가족부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일제 강점기에 위안부 피해자로 생을 살아오신 할머니들의 증언을 홀로그램 형태로 디지털 아카이빙 하느라 꼬박 영화촬영 스튜디오에서 밤낮을 보냈다. 나는 두 분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 500개에 달하는 그분들 삶에서 추출한 질문들을 가지고 이른바, 인터랙티브 다큐멘타리의 인터뷰 담당자로서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이 질문들에 관한 할머니들의 진솔한 답변들을 홀로그램으로 담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홀로그램 촬영이었기 때문에 대형 스튜디오에서 그린 스크린을 설치해야 했기에 스튜디오 촬영이 필수였던 관계로 지방에 거주하시는 증언자 할머니를 촬영 스튜디오 근처 호텔에 모시고 매일 그분과 함께 스튜디오로 오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날, 나는 가톨릭 신자이시기도 한 할머니의 요청에 의해 로만칼라를 했다. 연신 기록적인 고온의 기온을 갈아치우는 무더위 가운데 사제로서의 정장을 갖춰입고 이미 땀이 클러지 셔츠에 범벅이 된 채로 그분이 머무시는 호텔 로비로 갔다. 이미 할머니는 호텔 로비의 소파에 정갈하게 의복을 갖춰입으시고 지팡이를 옆에 가지런히 기대 세워 놓고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미 구순을 훨씬 넘기신 고령이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혼란한 시국에 나는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커다란 마스크를 낀 채로 소파 위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할머니를 매우 반갑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전날, 저녁 식사 때 당부하셨던 로만칼라를 하고 사제의 모습으로 나타나 준 나의 성의에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고맙다고 나지막히 말씀하셨을 때, 나는 그분의 눈가에 살짝 맺힌 글썽이다 휘발된 눈물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제의 모습 자체가 위로가 되기도 하다. 그날, 할머니에게 그 사제는 그랬다. 당혹스럽게도 할머니는 줄곧 당신 곁에서 당신의 수발에 도움을 주시던 요양사 선생님을 뒤로 물리우시더니, 나에게 오늘 첫 촬영, 곧 첫 증언을 시작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지를 물어 오셨고, 나는 그제서야 왜 전날, 나에게 사제의 모습으로 이 모든 프로젝트를 진행해 주셔야 하는지 당부하셨던 말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호텔 로비에서 그분의 고해를 들었다. 아침이라 매우 고즈넉 했고, 이따금씩 로비를 지나가는 투숙객들의 구두 굽 소리가 세련된 대리석 위를 지나갈 때의 소리들이 우리 둘 사이의 성사를 방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시간에 여전히 예상못한 채로 누군가의 고해를 들어야 하는 숙명의 삶을 사제들은 살아내야 한다. 더구나 거의 백년에 가까운 이른바, 한 세기의 인생 앞에서, 누군가가 들려주는 자신의 실존을 거쳐간 역사의 흔적들을 토로할 때, 하물며 그 흔적들이 대부분은 잔인하고 가공할 폭력과 연루되어 있다면 그 고해를 듣는 시간은 이미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고통의 시간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진정한 성사의 순간이리라. 그것이 아니면, 도저히 감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그날까지는 적어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당혹스러웠고 부끄러웠으며 동시에 참담하고 매우 고통스러웠다.

 

2주가 지나 다시 집에 돌아와 공동체 경당 안에서 흘린 눈물은 내가 두 할머니들에게 인터뷰 과정중에 던지 천개가 넘는 길고 긴 질문들이 마치 두텁고 알 수 없었던 영역의 역사라는 무지의 장막을 찢고 실체로 다가와 인간의 비참함을 현실감 있게 느끼게 해주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라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 모호하고 긴가 민가 하다. 심지어 한 세기에도 못 미치는 현대사의 가까운 진실들 앞에서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혹한 폭력과 죄성이 나에게는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그만큼, 내 앞에 앉아 마치 자신들의 육신을 지나간 현대사의 인류의 범죄의 역사를 겸손한 목격자처럼 증언하고 계시는 할머니들의 성숙하고 사명감 넘치는 태도가 강력하게 나를 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을 안이하게 혹은 의무감으로 떼울 수 밖에 없을만큼 분주하기 짝이 없는 이 미련한 수도자에게 증언자들은 그야말로 존재자체로 복음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촬영장에서 나는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느라 거의 가까스로 버텨내고 있었다. 다큐멘타리 감독으로서 묻는 내 직업이 어리석게 그분들 발 앞에 어처구니 없이 과녁을 빗나가면서도 겨우 가 닿았을 때, 오히려 나의 이러한 어리석은 질문들 존재 자체를 다시 빛내주며 그 질문들과 함께 사이좋게 다시 증언으로서 유효한 역사적 확신을 몸톰에 온통 간직한 채로 물어봐주는 나에게 환기되거나 다시 대답으로 되돌아 올 때 즈음이면, 나는 의식적으로는 거의 혼수상태가 되곤 하였다. 왜냐하면, 증언자들의 대답들은 그야말로 진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고통이 진실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고통을 살아 낸 이들만이 증언할 수 있는 발화자의 힘에 온전히 기인하는데, 인류에게 언제나 그랫듯이 고통은 인간의 최종심급의 언어가 아닌 까닭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최종 심급의 언어는 희망이며 사랑이고 동시에 용서이다. 바로 증언이 간직하고 있는 언어의 성사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할머니들께 물었다.

 

-무엇이 할머니의 삶을 침묵의 일관으로부터 발언할 수 있게 만들었나요?

 

할머니들은 정규교육이 거의 없는, 심지어는 글씨를 모르는 분도 계셨다. 하지만, 배움의 정도라고 할 수 있는 제도적 학식과는 별개로 인간에게는 축적된 삶의 지혜로부터 길어져 올라오는 참 지식이 있다. 그분들이 그 지혜로 대답해 주셨다.

 

-발언한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은 거의 수치에 가까워요. 하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해요. 이 수치스러움이 나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나 때문이 아닌것으로 머물지 않고, 내 뒤에 올 딸들, 곧 여성들에게도 미치게 된다고 생각하니 이 수치스러움을 안긴 주인들을 지목하고 그들의 책임을 물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들의 책임을 묻지 아니하면, 똑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니까요. 여성들 몸 위에 이렇게 똑 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나를 참을 수 없게 합니다. 바로 이 반복되는 인간의 행위가 죄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리고 싶었어요. 말하자면, 나는 인간의 죄를 고통스럽게 외치는 중입니다.

 

인간의 죄를 외치는 행위는 예언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듣게 되는 예언자의 모습은 가히 영웅적이거나 심지어는 그들의 이름, '예언자'라는 명칭의 고귀함과는 전혀 맞지 않게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비참했다. 당대의 목소리, 이른바 시대 경향과 철저하게 거스르는 목소리를 지닌 자들이 바로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내 앞에 앉아 차분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구술하고 또 대답해 나가면서도 동시에 시대를, 또 잘못된 역사를 고발하고 철저하게 탄핵하는 그분들의 목소리는 물리적으로는 약하고 쉽게 지칠 수 밖에 없으며 심지어는 눈물겨운 설움이 고스란히 담길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외피를 입고 있었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복음적이고 강력하며 오래도록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아니라 언어의 성사처럼 영원할 것 처럼 느껴졌다.

 

이렇듯, 나는 지나간 역사 안에서 명백하게 자행되었던 폭력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당혹스러웠던 경악의 표정에서 점점 결의에 찬 표정, 곧 이들의 실존 안에 머무는 진실을 왜곡하려는 모든 태도들과 맞서 철저히 쟁투하는 것이 바로 복음적이라는 진실의 얼굴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였다. 나의 질문들이 거의 끝나가고 내가 거의 형식적으로 할머니께 이러한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질 때였다.

 

-할머니, 마지막으로 저에게 하고 싶으신 얘기가 있으세요?

그때, 할머니는 자세를 고쳐 앉으셨다. 홀로그램 촬영 특성상 자세가 고쳐지면 기술적으로 그 쇼트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탈락한 쇼트이다. 소위, '오케이 컷'이 아닌 것이다. 나는 기계적으로 '' 싸인을 불렀고, 나의 이러한 주문에 역시 기계적으로 응답할 수 밖에 없는 현장의 촬영감독은 카메라를 멈췄다. 그때, 자세를 교정하려는 조감독의 스튜디오 진입이 막 이뤄지려는 찰나, 할머니는 그 어떤 증언 때의 시점 보다도 훨씬 자신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신중하고 또 힘이 있게 진술을 이어가기 시작하셨다. 나는 손짓으로 조감독의 스튜디오 진입을 막았고 할머니의 진술을 들었다. 내가, 나에게 하실 말이 없냐는 질문에서 비롯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진술은 사실 나에게 묻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 도미니코 신부님, 나도 신부님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나는, 바로 지근 거리에서 할머니의 이 모든 증언들을 들어 왔기 때문에 방금, 하신 이 할머니의 질문을 전혀 못 알아들었을리 만무했다. 하지만 흔히 인간 사회에서 자신이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때의 행동처럼 나는 순간, 못알아 들은 척 연기했다.

-....? 할머니? 좀 크게 말씀해 주실래요...?

 

할머니는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쳐 앉으셨고 반복하지만, 이 쇼트는 탈락한 쇼트이며 쓸 수 없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예언자적이다. 쉽게 가공해 쓸 수 없는 소리를 내는 자. 할머니는 다시금 나지막하지만 매우 또렷하게 다시 질문해 오셨다. 이쯤되자, 내가 증언자가 되어 있었고 이제 할머니가 질문자가 된 셈이었다.

 

-니코 신부님, 저와 같이 배우지 못했고 내 목소리를 오래도록 갖지 못했고 무식해서 내가 하는 행동들이 도대체 옳고 그른 것 조차 알지 못한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친구가 많지 않아요. 아니, 거의 없어요. 오히려, 우리같은 사람들은 이용만 당하죠. 철저하게 쓰다가 버려져요. 이렇게 쓰다가 버려진 사람들은 친구가 없어요. 아니,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 저와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친구가 신부님이었으면 참 좋겠어요.

 

나는 내가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아니 거의 상상도 못했던 이 어려운 질문 앞에서 시간을 벌 참으로 할머니에게 다시금 여쭈었다.

- , 사제가 그런 분들의 친구이면 좋겠어요?

 

의외로 할머니의 대답은 간결했다.

-세상은 신부님의 말을 믿으니까. 신부님이 저의 친구이면 세상이 친구인 저의 말을 대신 하는 신부님의 말을 믿을 거 아니겠어요?

 

나는 다시 할머니께 이야기했다. 이미 옆에서는 내 싸인도 없이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ON' 스위치로 옮겨가는 반역에 몹시 신경이 쓰였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할머니와의 대화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세상이 사제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시대에요.

 

할머니도 물러서지 않았다.

-증언을 해야지요. 신부님도. 신부님이 저에게 표현하신 대로 '신부님 몸을 지나간 하느님'을요.

 

나는 '내 몸을 지나간' 하느님에 대해 아는 바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그것을 언어의 성사라고 할 수 있는 '증언'의 형태로 세상에 말해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내 말의 대부분은 합리적이며 그럴싸한 형태를 지녔고, 그러기에 귀에 익숙하게 들릴 뿐만 아니라, 때론 달다. 하지만, '내 몸을 지나간' 하느님의 언어는 어렵고 상처에 민감하며 방만한 삶에 대한 쓴 소리이고 사람들을 쉽게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예언자적인 말이다. 하느님에 대한 '증언'과 평범한 설명에 가까운 '진술'의 차이는 '나를 지나가고 있는가'의 차이인 것 같다. '증언'은 고통스럽게 ''와 불화하며 스쳐갔지만, 나를 성장시킨 소리들이 나의 언어로 안에 고여 마침내 그 결정체의 소리들이 나의 실존의 울림판을 훑고 뱉어져 나오는 진실의 음성이기에 나 자신이기에 그렇다. 나는 할머니와의 대화 가운데 이렇듯 '증언'을 배운 것 같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순간 할머니에게 응답해야 할 차례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말했다.

-할머니, 제가 친구가 되어 드릴게요. 그리고 다른 모든 할머니와 같은 분들의 친구가 될게요.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마쳤고, 촬영도 모두 끝났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공동체 경당 안에서 나는 이 모든 시간들이 나를 성장시키는 그분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되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러 갔지만 예수회 수도자의 삶이 늘 그러해야 하듯이 그 일이 바로 사도직이며 그런 사도직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또 그분이 나를 발굴해 내시는 순간임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어 무척 기쁜 회한의 눈물이 벅차 올랐던 것이리라. 희미한 감실등 옆에 고이 나를 내려다 보시는 공동체 경당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나의 손에는 어느덧 할머니가 촬영을 모두 종료한 다음 나에게 건네어 주셨던 5단짜리 묵주가 쥐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이 베이지 색의, 당신이 손에 쥐고 늘 간직했던, 어쩌면, 당신이 나에게 선물할 수 있었던 물질적인 선물로서는 유일한 이 묵주를 내 손에 쥐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 친구, 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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