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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포커스] 김상용 도미니코 신부의 수도자 일기 4 - "니코데모를 위한 변명"

2020.07
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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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데모를 위한 변명

 

그 날은 거의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이 검은 먹구름이 선산 주변을 완전히 뒤덮고 있을 때였다. 계절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된 기억이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선산 언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학교에 가지 않을 나이였으니 상당히 오래된 기억의 흔적이리라.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는지 간혹 단추를 열어 둔 아버지의 긴 외투가 펄럭이며 키가 작은 나의 얼굴을 가볍게 도닥이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아버지의 외투를 빼꼼히 손가락으로 헤치며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뭔가 상당히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상황이라는걸 어린 나는 충분히 직감할 수 있었다. 선산 아래에서는 할아버지가 검고 긴 두루마기를 입으신 채로 여러 봉분들이 즐비한 선산 아래에서 묘지 일꾼들을 지휘하고 계셨다. 그 날은 선산의 조상묘를 옮기는 이장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선산을 가로지르는 새로날 도로에 결국 선산 이장을 결정한 할아버지의 비장한 표정이 그 날따라 돋보였다. 허연 할아버지의 수염이 강한 바람에 한쪽으로만 쏠려 흩날렸다. 나는 간헐적으로 나의 얼굴을 가려주는 아버지의 외투 속에서 얼굴만 간신히 뺀 채로 아무 말 없이, 아니 오히려 말을 하면 안될 것 같은 어떤 경외감에 가까운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의 얼굴과 먼 곳에서 자신의 임무를 적요하게 수행하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표정을 번갈아가며 쳐다 보고 있었다. 마치, 언덕 아래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거대한 파노라마 화면에서 영사되는 대서사시에 가까운 흑백영화처럼 장엄하고 숭고한 이미지였다. 여러 봉분들을 오고 가시는 할아버지의 조찰한 걸음걸이들에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된 것이지만,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인간이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행위만으로도 '예(禮)'와 '도(道)'를 표현 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진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선산의 언덕 아래는 여전히 어떤 숭고한 의식이 치러지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고도의 집중력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조상들의 영현들에게 향해 있었다. 나는 그때의 광경, 곧 어떠한 '인간의 말'도 들리지 아니하면서 밀도 높은 침묵의 환경 아래에서 적요하게 수행되고 있는 언덕 아래의 인간들의 몸짓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손이 시리운데도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외투를 얼굴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기 사작했다. 진눈개비처럼 하얗고 순결한 물질들이 언덕 아래로 강하게 나부끼자 검은 두루마기를 입으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언덕 아래로 바람에 휘날리며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할아버지를 포함하여 묘지 일꾼들과 여러 봉분에 제를 올리는 후손들의 몸 가짐은 전혀 영향받지 않으면서 그 아름답고 느린 동작은 마치 고도로 훈련된 무용수들의 움직임처럼 자못 장엄하면서 절도가 있었다. 그때였다. 한쪽 손을 아버지의 손 안으로 넣고 꼼짝않던 나는, 순간 아버지의 커다란 손 안으로 갑자기 움추려 들며 숨어버리듯 전율했다. 언덕 아래에서는 어느 커다란 봉분이 마침내 열려지고 한쪽으로 잘 쌓아 둔 훍더미 옆에 선 채로 그 열린 봉분 앞에서 허리를 조아린 흰 수염의 할아버지가 흐느끼며 곡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 곡 소리가 선산 전체로 공명이 되어 마침 하늘에서 내리는 흰눈과 어찌나 길고 또 인상깊게 들려왔던지 어린 나는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슬퍼서 울었던 것이라기 보다 인간의 어떤 아름답고 숭고한 몸의 표현으로 인해서 내 몸이 그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것이라 믿고 싶었지만, 어찌되었든, 당시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는 나를 달래시면서, 할아버지가 슬퍼서 우시는 게 아니라고 내 귓가에 속삭여 주셨다. 나는 그럼, 할아버지가 왜 저렇게 우시는지를 물었고 그 물음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이 오랜 세월을 지나 부활 주간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다시금 이렇게 가슴저미고 아스라하게 귀환하고 있다. 이제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두 그곳에 묻혀 계시다.     

        

 현실의 주체를 압도하는 절망의 사건들은 대부분 극도로 비극적이다. 이를테면 죽음이 그러하다. 이 비극의 탄생에서 그 국면이 보여주지 않으면서 은폐시킨 실재(Reality)가 있다. 보통, 이 실재는 보이지 않거나 은신되어 있다. 이를테면 삶, 곧 생명이 그러하다. 은폐된 실재를 '보는' 행위가 요한복음의 주제인 '보고 믿었던' 흔적의 역사이며, 이 흔적을 거룩한 전례 안에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그 실재를 가까스로 가늠해보거나 애써 가 닿으려 노력할 수 있다.

 

니코데모가 그랬다. 자신을 압도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곧 <그 밤>(요한 3장) 이후, 떨리게 믿었던 '그 예언자(The One)'가 허망하게 처형되어 막 숨을 거둔 그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완전한 비극의 탄생. 그는 십자가 위에서 시신을 수습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마침내 비극이 은폐시킨 국면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게'된 것이다. 이 순간, 그는 모든 당혹감이 물러가고 새로운 감수성이 자신을 채우고 있음을 깨달아 간다. 그 새로운 감수성은 바로, 적요한 수행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힘이며 동시에 선형적인 시간이 물리적 제약으로부터 마침내 해방된 상태인 신비 안으로 흡입되어 들어가 <그 밤>에 그 예언자와 나누었던 말(Logos)들이 자신 안에서 살아 움직일 뿐만 아니라, 통렬히 이해의 범주로 포착되는 일치감의 감수성이기도 하다.

 

'적요한 수행'과 삼위일체의 공동체성만이 가능케하는 자기 인식의 순간이 바로 자기 이해로 귀환되는 이 '완전한 인식(perfect knowledge)'이 니코데모 내면에서 일어났다. 그는 인류사에서 벌어진 현상의 서사(narrative)가 원죄 이후에 간직해 온 뚜렷한 한 징후들, 이를테면 현상이 곧 실재(reality)라고 믿어왔고 그 이상은 없다라고 단정해 온 리얼리즘을 오염시켰고 그 감염의 효과가 현상의 서사를 축소 은폐시킨 결과임을 깨닫게 되었다. 현상의 서사는 이제 해방되었다. 현상은 '눈 앞에 벌어진 일에 대한 가시적 팩트'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언제나 '눈 앞에 벌어진 일이 갖게되는 전망(vision)'과 연루된다는 점에서 계시(revealation)와 맞닿는다. 니코데모는 이제 <그 밤>에 그가 얘기했던 말(Logos)의 핵심을 깨닫게 되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려내려는 것이다.”(Jn. 3,21)

 

니코데모는 '자기가 한 일'을 지속적으로 적요히 수행하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식을 통해 신비로 나아가며, 그 신비 안에서 '빛'을 만나게 되고, 자신이 내리는 시신 한 가운데에 서서 자신의 눈 앞에 벌어지는 일이 갖게되는 전망(vision)을 접하게 된다. 이 전망, 곧 비전이 바로 파스카 체험이다. 현상의 서사에 막혀 있었던 돌을 치우고 새로운 전망을 꿈꾸며 빈 허공과도 같아서 서사의 무덤이랄 수 있는 끝의 역사에서 역설적으로, 드디어 처음의 역사 행위를 적요히 수행하는 것 말이다. 이 때, 주체성을 가진 자의식의 주체는 빛으로 흡입되어 들어가면서 신비라는 새로운 서사의 서막을 접하게 되는데 '빛의 인력(引力)'에 이끌리는 이 강력한 끌림에 의해 자기를 비우고(kenosis) 마침내 자신이 행하는 이 모든 적요한 수행을 삼위일체의 공동체성에 기인하여, 말씀(Logos)-파견(Missio)-아버지의 뜻을 행하는(poieo) 차원으로 승화되어 나아가게 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삼위 일체의 서로간의 위격의 완전한 비움이 전제된 지극한 겸손함으로 공동체를 이루셨고 이 비움의 공간에 새롭게 탄생하는 창조와 구원의 사유가 말씀(Logos)이다. 만물은 바로 이 창조와 구원의 사유로 말미암았고, 구원의 사유의 육화가 바로 성자 그리스도의 파견(Missio)인 것이다. 육화한 성자는 아버지의 뜻, 곧 진리 그 자체로서 인류에게 당신을 현현하셨으며 당신의 유일한 사도직 행위, 곧 구원의 경륜은 '만들고 구성하는(poieo)'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주셨다.

 

니코데모는 '빛의 인력(引力)'에 이끌려 주체를 상실한 채로 신비 그 자체를 다루는 데에 적요한 수행으로 일관했다. 그의 잃어버린 주체는 성삼위의 공동체성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온전히 자신이 존재하면서도 자신만으로만 있지 아니하는 비움의 신비체 안으로 틈입해 들어간다. 그 공간에서 그는 '무(없음)'를 경험했을까. 그곳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운이랄 수 있는 '만들고 구성하며 창조하는(poieo)'생명의 기운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만들고 구성하며 창조하는 힘을 말없이 수행했다. 이것이 십자가 위에 들리움(Lifted-Up)을 '보고' 이 완벽한 치욕과 절망의 현상적 서사에 갇히지 아니한 채 눈 앞에 벌어진 일이 갖게되는 전망(vision), 곧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인간적인 갈망인 희망이라는 부활을 '보고 믿었던' 신앙의 핵심일 것이다. 나는 요한복음 3장의, 한밤의 은밀했던 니코데모의 등장과 19장의 그가 행한 십자가 아래에서의 '적요한 수행' 과정 모두를 부활시기의 관상기도 주제로 삼고 기도하면서, 내내 아련한 내 어린시절의 기억에 등장했던 할아버지의 그 아름다운 검은 두루마기의 강건했던 펄럭임의 자취들이 소환되어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렇듯 내 어린시절의 기억과 병첩되어 니코데모의 십자가 아래에서의 행위는 어떤 숭고한 진리를 수행하고 있는 인간의 예(禮)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시절, 열린 무덤 앞에서 곡을 했던 할아버지의 구슬픈 음성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던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가 지금 슬퍼서 우시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그럼 왜 할아버지가 우시는 건지를 물었던 물음에 대한 오래된 답이 나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시절, 바람불던 선산 언덕 위에서 어린 나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셨고, 그 속삭임은 나의 귀에 와 잠시 머물다가 그날따라 유달랐던 바람, 그러니까 긴 세월의 시간이라는 영겁을 돌아 바람과 함께 미래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니코, 눈물이 선물이 될 수 있어. 할어버지의 눈물은 할아버지의 아버지에게 선물이야.”

 

니코데모는 절망의 최근거리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바로 아래에서 이 모든 것을 경험했고, 인간의 경험은 섬광과도 같이 그가 겪은 모든 시간을 소급하고 미래의 시간까지 휘발하며 마침내 한 순간으로 집중하여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끈다. 그 깨달음의 시제는 현재가 아니라 오히려 영원이다. 십자가 아래에서 그는 복받쳐 오르는 모든 눈물을 선물로 지금 당장 자신이 안고 있는 식어가는 시신에게 선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시신은 자신의 몸체 위로 떨구어진 그의 눈물, 곧 사랑의 선물이 유일한 부활의 동력이 되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자신의 무지가 완전한 이해라는 신비 안으로 치유되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니코데모는 적요한 자신의 침묵의 몸짓 전체를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삶'의 신비로 옮겨가고 있다. 니코데모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바람의 방향으로 뭉근하게 움직이며 예(禮)를 다하는 할아버지의 그 오래된 적요한 수행의 표상으로 나에게 고요를 선물하고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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