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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포커스] 이근상 시몬 신부의 영신수련 에세이 3 - 불편심, 기도가 이루어지는 자리

2020.03
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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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심, 기도가 이루어지는 자리

 

기도는 어디서 할 수 있을까? 어디서 해야할까? 영신수련은 ‘원리와 기초’를 통해 기도, 삶이 이루어지는 마음의 공간을 불편심indifference이라 가르친다. 애착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감정, 욕구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의 선택. 내 것이라 여겨온 것(ego)과 나 자신(self)의 사이에 틈을 내며, 성령(바람)이 불 수 있는 공간을 여는 것, 곧 인간의 깊이를 발견하는 일, 불편심.

 

익숙하지 않기에 서늘하고 차가워 그 공간을 허용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지만, 한번 두번 이 공간에 깃들이는만큼 우리의 기도는 자유롭게 숨을 쉰다. 오래된 무기를 내려 놓은 공간은 빈자리여서, 세상의 온갖소리들, 악귀들이 쉴새 없이 몰려오고 몰려가는 열린 광야이기에, 불편심은 달콤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어린 아이에게는 힘든 일이다. 애들은 모든 위험과 두려움에서 차라리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그러나 어른이라면? 어른의 기도에는 오히려 두려움 앞으로 나가 ‘벗어나라!’ 외치는 분의 목소리를 기억해 내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치 않을까. 오래묵은 익숙한 빛들이 사라져버린 공간은 어둡고, 우리의 온갖 감각은 어두울 수록 더 선명하게 더 강한 애착과 더 큰 두려움으로 우리 자신을 던지고자 한다.  그러니 불편심의 공간에서 우리는 방심할 수 없다. 모든 걸 헐렁하게 내 놓고 기다릴 수 없다. 불편심 속에서 시쳇말로 잘 정리된 영화같은 ‘관상’이란 가당치 않다. 빈 배를 흔드는 밤바다의 파도가 높고 검기에.  


불편심, 이 불편한 공간에서,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빈 손에 선물을 쥐어준다. 작은 새를 건네준다. 놓아 버리는 것도, 움켜쥐어 죽여서도 안되는 팽팽한 긴장, 우린 미묘한 악력을 가하며 쥐어야 하는 여린 생명을 건네준다. 그것은 말씀. 두려워하지 말라는 생명의 말씀, 말씀의 여린 새를 쥐도록 초대한다. 망망대해의 나침반처럼, 밤하늘 북극성처럼 하나에만 의지하는 가난한 마음. 작은 빛을 손에 쥐는 것. 불편심 속 위로란 가난하다고 확신한다. 그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당신의 목소리를 다시 떠 올리고 떠 올릴 뿐이다. 세상이 비웃는 이 가난한 말씀은 세상 것으로 채워본들 채울 수 없는 인간만의 배고픔에 자기 심장의 박동을 건네며, 자신의 온 몸을 맡기며, 힘풀린 우리의 손아귀에 겸손하게 들어온다. 가난한 귀에 깃들이는 여린 소리. 빈 손의 거룩함에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목소리가 깃든다.

 

참으로 원하는 바의 것을 추구하는 청원은 작은 새를 쥔 손으로, 불편심으로 가능하다. 정말 원하는 바의 것. 이제 죽는다면 청해야 할 바로 그것은 세상의 숱한 바람들과 달리, 헛빛이 다꺼진 고요한 검은 공간, 작은 손아귀만이 감지할 수 있는 생명이다. 숱한 바람들 넘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숨죽이며 날을 기다려온 바로 그 여리고 고요한 갈망이 작은 손에서 제 심장을 박동하며 말을 한다. 보드랍고 여리게 우리의 처분에 온 삶을 맡기는 겸손. 그러니 바른 청원이란 소리쳐 말하는 자기주장, 곰곰이 따져서 베스트를 찾아낸 뒤 제시하는 입찰 따위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청원은 내는게 아니라 받는 것, 말하는 게 아니라 듣는 것, 그것도 숨죽이며 조심스레 들으며 간직하는 악력의 긴장이다. 불편심이란 꽉 쥐어서도 놓아서도 안되는 조심스러운 경외다.

 

광야, 검은 밤. 여전히 세상 것이 휘몰아쳐 다가오고 흩어지는 온갖 분심의 공간, 불편심.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작고 보드라운 말씀, 두려움을 아는 자의 속삭임을 듣는다. 나를 따르라는 그 여린 생명의 말씀을 듣는다. 낯선 긴장에서 벗어나 ‘그저 익숙한 너란 일상으로 돌아가라’며 끊임없이 유혹하는 자글거리는 조바심 역시 출렁이며 우리 곁에 있다. 기도는, 자유는 결국 이 모두를 곁에 두고 홀로 견디어야 하는 이의 몫. 그러나 참으로 홀로 견디어본 자는 안다. 우린 혼자 일 수 없는 존재. 빈공간에는 우린 혼자가 아니다. 어둠이 내리면 홀로 된 이들의 마음이 하나둘 반짝인다. 다가온다. 내 작은 손아귀 속 검은 문이 열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발견된다. 하나 둘 그렇게 자유로운 이들이 바람이 되고, 동지가 되고, 한 몸이 되며 흐름이 된다. 그렇게 기도하는 자들, 오랜동안 익숙하게 움켜진 것들을 잃어버린 자들, 놓을 밖에 없는 자들, 그렇게 작은 새가 손에 깃들인 자들, 가난하여 자유로워진 이들의 숨결이 서로의 어머니가 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말씀이 된다. 기도는 늘 더 낮고 더 너른 땅으로 모이는 물처럼 더 낮은 자의 검은 문으로 낮고 낮게 흘러 모인다. 해서 불편심은 혼자 누리는 덕성일 수 없다. 불편심은 밀려난 이들이 모여드는 낮은 곳을 향하는 흐름, 거기서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다. 불편심, 기도의 자리는 기도밖에 없는 달리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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