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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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페드로 아루페 - 세가지 모델, 세가지 사랑 (1977년 1월 15일, 입회 50주년 미사 강론)

20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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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세가지 모델, 세가지 사랑”

페드로 아루페


1977년 1월 15일 페드로 아루페 신부는 예수회 입회 50주년을 맞이하여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아루페 신부가 미사에서 나눈 강론을 소개합니다. 



1. 공통적이지만 별개의 것

공통분모이지만 차이를 살아가기


오늘 미사는 여러분이 참여한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에는 한가지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자신의 불충실성을 겸손하게 의식하는 사람이 자신의 비루함을 받아들이는 진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주님의 관대함과 그분을 향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다. 한 인간이 갖는 비루함과 한계와 창조주의 위대함 사이의 이러한 변증법은 각 개인의 역사에서 씨줄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사람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이들은 각자의 독특한 특성과 성장을 보여줍니다. 각자는 서로와 구별됩니다. 각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갖습니다. 각자는 자신만의 특별한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역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각자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사자조차도 완전히 이해할 길 없는 개인적인 비밀 말입니다. 이 비밀은 숨겨져 있는 공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조차 반쯤은 숨겨져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공간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내적이며 깊이가 있고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공간은 사랑이신 하느님,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존재 밑바닥에서부터 그분께 자신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가장 긴밀한 관계의 공간입니다. 이곳은 놀라운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사랑은 자유로이 각자의 삶 속으로 스며듭니다. 예측할 수 없고 표현할 길 없으며 합리적이지도 않고 저항할 수 없는,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결정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 어떤 개인의 삶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범주로 정의되거나 표현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각자의 삶에는 두가지 생명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생명력이고 다른 하나는 신적인 생명력입니다. 그리고 후자는 모든 지성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대로,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로마서 11:33)

 

삶의 전환점

저의 70년의 여정 -그중 50년은 예수회에서의 시간이었습니다.-을 돌아보면서 저는 제 삶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순간들, 근본적인 전환점들이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합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저는 하느님의 손이 제 인생의 타륜을 대담하게도 틀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제 흥미를 끌었던 의학공부를 시작하고 한창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던 시기의 예수회 성소는 그랬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 이전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일본선교 성소 역시 그랬습니다. 장상들은 제가 윤리신학 교수가 되도록 준비시켰고 십년동안이나 일본선교로의 제 청원을 거부하셨습니다. 최초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도시에 제가 있었던 일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예수회 총장으로 제가 선출되었던 일도 있습니다. 이들 순간들은 갑작스러우면서도 예기치 않은 일입니다. 동시에 저에게는 너무나 분명하게 하느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순간들로 보였고 지금도 여전히 하느님 사랑의 섭리가 그 현존을 기꺼이 드러내고 우리 각자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하느님의 일련의 ‘갑작스러운 침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저의 반응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이사야 6:5),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예레미냐 1:6), 모세 예언자의 말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겠습니까?” (탈출기 3:11)를 떠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비루함-오늘 여기에서는 저의 비루함이 되겠습니다.-이 하느님의 축복을 상기하면서 놀라움과 감사함을 빚어내는 수많은 기념일 중의 하나를 여러분의 도움으로 치러내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놀라움과 감사함은 제 삶에서 중요하고 결정적이며 특권적인 순간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단조롭고 따분한 매일의 일상의 여정에서 제가 받은 측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일련의 은총들에도 해당됩니다. 이 모든 기억들을 통해 제 삶은 이제껏, 아니 최소한 지금부터 끝나지 않는 마니피캇(마리아의 노래)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저의 비루함을 의식하고 느낄 때, 순명이 제 미약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다양한 책임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안도감을 느낄 때, 이 감정이 저를 휩쓸고 갑니다. 제가 느낀 감정은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는 것이며 주님이 주는 보증과도 같습니다. 물론 주님은 늘 인간 편에서 “조건이 충족될런지”에 대해서, 혹은 자신이 끝까지 충실할 것이지에 대해서 불안한 의심을 남겨두시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불안전함이 주는 빛과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불안전함이야말로 하느님의 도움으로 얻게 된 안도감을 더욱 확고하게 경험하게 합니다.

 

2. 아브라함, 바오로, 하비에르

abraham-receiving-the-three-angels-1667.jpg아브라함: 알 수 없는 곳으로의 부르심

최근의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저는 제 영혼의 상태를 상징하는 세 명의 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 이 분들은 저를 돕고 가르치는 보호자이자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분은 관대하면서도 결단력있는 족장으로 자신의 땅에서 나와 미지의 다른 곳에서 자리를 잡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땅과 아버지의 집을 뒤로 하고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분에게 말한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 (창세기 12,1)을 찾아서 말입니다. 이는 불과 몇년전 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던 종류의 부르심입니다. 야훼 하느님으로부터의 부르심, 예기치 않는 하느님의 “갑작스러운 침입”, 미답(未踏)의 과제인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은 불가해하고 그 성취는 한 사람의 전 생애를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곧바로 도정(道程)에 서게 됩니다. 맹목적인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었습니다.” (로마서 4:18)

제가 예수회에서 시작한 저의 삶의 첫번째 시기 동안의 저의 내적인 상태가 이랬습니다. 제가 일본을 향해서 길을 떠난 순간 그리고 특히 제가 예수회 총장으로 선출되었던 날이 그랬습니다. 이 여정의 마지막 체험은 엑소더스입니다. 훨씬 급진적이고 극단적일 정도로 불확실하며 엄청난 책임감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엑소더스 말입니다. 이는 습관과 관습들, 생각들과 선택들의 전체 세계로부터의 엑소더스입니다. 정확함이나 명료함, 그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는 다른 세계를 선택하기 위해서인,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엑소더스입니다. 이는 교회와 예수회의 수세기 동안의 오랜 전통에 의해서 가능해진 안전한 세계로부터의 엑소더스이며 저를 하느님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님, 예수회 총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부르시고 계시는 미지의, 여전히 “형성중인” 세계로 이끄는 여정으로의 엑소더스입니다. 그렇기에 이 여정은 미지의 요소들과 도전들로 가득 찬 여정이면서도 희망과 기회로 가득 찬 여정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은 지난 시기 그랬듯이 계속해서 하느님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항상 저에게 영감의 끊임없는 원천이었습니다. 누군가 “예수회는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저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이 이끌고 계시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디론가 이끄시고 계신다는 것, 우리가 확신에 차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도록 허락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땅, 약속의 땅, 하느님의 땅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곳이 어딘지 아십니다. 우리의 과제는 오직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입장은 신앙이 없다면 절대적으로 불가해하고 경솔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다면, 이 입장은 분명하고 안전하며 위로를 주는 입장입니다. 하느님의 논리로 추론하는 이에게는 오직 이 입장만이 진실되이 납득이 되며 독특방식으로 신중한 입장입니다. 이러한 자기포기의 정신, 자신을 맹목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내맡기는 정신은 오직 신앙의 힘으로만 경험할 수 있는 위로와 힘의 원천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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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힘

이러한 여정에 어려움들, 오해, 장애가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능력 이상”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저의 두번째 모델이자 수호성인인 성 바오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충고는 영감을 주었고 제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1코린토 15:9-10)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피 4:13)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로마 8:31) 주님을 따르고자 노력하면서 우리는 바오로가 그러했듯이 “그대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듣게 될” (사도행전 9,6) 그 때를 위해서 끊임없이 청해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분의 응답을 듣게 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 15:7) 그 결과는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전능함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분의 뜻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 23,13)


하지만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로마 11:33) 그렇기에 그 결과 또한 모든 것이 행복한 끝맺음으로 끝나고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유의 방식에서 십자가는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특별한 표징을 남깁니다. 신앙이 있는 이들에게는 이 “미친 짓”과 “장애물”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모델인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티아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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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하느님께 대한 흔들림없는 믿음

저의 세번째 모델이자 수호성인은 예수회의 성인으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입니다. 하비에르는 사도적 에너지의 원천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 있었던 분입니다. 만약 자신과 자신의 능력에 더욱 의지하는 이라면 그 힘은 덜할 것입니다. 하비에르는 십자가와 수난의 가치를 명민하게도 이해하였기에 그의 기도는 십자가와 관련된 것일 수록 “더욱 더”를 읊었고 위로와 관련되었수록 “충분합니다, 주님. 충분합니다.”라고 읊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바오로, 하비에르라는 세 명의 인물은 저에게 끊임없는 영감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그분들은 완전한 불편심이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성령의 화신이었으며 이냐시오 겸손의 세번째 단계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이냐시오의 말씀의 참 의미를 온전히 실현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마치 일의 성공이 여러분에게 달려있고 하느님께는 전혀 달려 있지 않듯이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하지만 일을 할 때에는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하시고 여러분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이 하십시오.” 


3. 예수회, 교회, 그리스도

50년동안의 수도생활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한 사랑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성장하고 커졌습니다. 이 사랑은 모든 참된 사랑에 합당한 특징을 갖췄습니다. 더욱 고통받을수록 더욱 사랑하는...


예수회는 이냐시오의 카리스마의 육화이다. 

첫번째 사랑은 예수회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하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입니다. 수련원때부터 시작되어 그 단순성을 잃지 않고 삶의 경험 속에서 특출나게 깊이 있고 강고해지는 사랑입니다. 


예수회는 이냐시오 카리스마의 표현이자 육화로 이해됩니다. 이 카리스마에는 복음적 직관이 있습니다. 이 직관에 친밀해질수록 그 단순성이 더 잘 드러납니다. 이는 사랑의 직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이 요소들은 서로 화해할 수 없을 것이요, 참된 사도적 열정을 억누르는 이분법과 긴장을 야기할 것입니다. 활동-관상, 신앙-정의, 순명-자유, 가난-효율, 일치-다원성, 개별성에 대한 감각-보편성에 대한 감각의 이분법 말입니다. 오히려 이냐시오 성인은 서로 갈등관계처럼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놀라운 해결책을 발견하여 엄청난 사도적 효율성을 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총장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영적 체험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토록 많은 예수회원들을 ‘안으로부터’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 매우 다양한 방식과 환경에서 직간접적으로 그들을 만나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저에게 이는 가장 위로와 자극이 되는 순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회원들의 덕과 재능을 본다는 것은 말입니다. 이는 마치 하비에르가 암보이노[현 인도네시아 위치]에서 유럽의 동료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느꼈음직한 것과 약간 비슷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잊지 못하기에 ...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보내준 편지에서 여러분의 손으로 직접 쓴 이름들을 찢어 두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랍니다. ... 그 찢어낸 조각들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이 조각에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분은 고아에서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만약 이 현세에서 서로를 사랑한 사람의 심장을 보고 싶다면, 여러분 믿어주십시오, 저의 심장을 보십시오. 제 심장에서 여러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 심장에서 여러분을 확인할 수 없다면, 이는 내가 여러분을 너무나 높이 올려 존경하는데 반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덕으로 인하여 너무나 자세를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겸손으로 인하여 제 심장 안에 있는 여러분을 확인할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예수회의 미래에 대해서 품고 있는 낙관주의의 근거 중의 하나입니다. 이냐시오의 아들들에게 같은 소명을 주시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을 따르도록 하신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계속해서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자신이 이런 기대를 밝히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께만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 희망은 주님이 시작하신 길을 따라 우리가 품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를 이제까지 도와주셨다면 왜 주님께서 장차에도 그러시지 않을 것입니까?


예수회는 사도적인 기관이며 수단입니다. 지난 세월동안 예수회 기관과 구조가 현재의 사도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너무나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이냐시오 성인이 지니셨던 통솔의 재능과, 개인과 기관 모두가 효율적이고 상황에 적합해지기 위해서는 유연해야 한다고 이해하셨던 점에 대해 분명히 깨닫습니다.


예수회의 참된 현실을 바라보면서 저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깊은 애정을 품고 썼던 글을 기억하곤 합니다. “나로서는 이 편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 외에는 더 좋은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만약 예수님의 이름을 딴 이 수도회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그 솜씨를 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회에 그토록 많은 빚을 졌다는 사실을 여러모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위계적 교회

두번째 사랑은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그 어떤 흠이나 구김없는” 그리스도의 정배, 이냐시오의 표현으로는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위계적 교회”에 대한 사랑입니다. 맞습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가 만드셨고 로마 교황이 가시적인 수장으로 계시는 교회, 우리는 순명이라는 특별한 서원에 의해서 묶여 있는 교회입니다. 이 순명이 바로 “예수회의 원리이자 기초”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게 되면 교회 안에서 그러한 고요하면서도 늘 변치 않는 활기를 발견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 활기는 교회의 비가시적인 수장인 그리스도와 그분 성령의 생명을 주는 활동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렇기에 교회에 대한 믿음은 더욱 굳건해집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교회를 떠난 많은 이들을 만날 때 더욱 확실해집니다. 이들에게는 교회를 떠난 정당한 이유들이 있지만 이들이 교회와의 통교의 특징인 성령의 움직임에서 절연(絶緣)한 결과로 나타나는 이들의 윤리적인 태도의 침체와 위축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삶이 굴러가면서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신비와 예수회의 카리스마에 더욱 깊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예수회의 참된 존재이유가 로마 교황 밑에서 교회를 봉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이 확신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회가 그리스도의 정배와 그분의 대리자에게 가능한 한 항상 충실했다는 사실을 보는 것은 위로가 됩니다. 


영원한 임금이신 그리스도

세번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영신수련의 영원한 임금이시자 하느님의 강생하신 아드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분께 인격적인 사랑을 느끼고 있으며 예수님은 우리 영성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깊이 만족감을 느끼고 뿐만 아니라 다른 만족감의 원천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과 이상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성령을 주시고 우리를 그분의 살로 배불리십니다. 그분은 감실에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그분 사랑의 중심이자 상징인 그분의 꿰찔린 심장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자신을 배고프고 헐벗은 이들, 세상 주변으로 내몰린 이들과 같은 분이심을 드러내보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기쁨과 슬픔의 수많은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마치 친구처럼 우리에게 희망을 품고 부르시고 말을 건네십니다. “주님이 여기서 너를 보고 싶어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라 스토르타에서 이냐시오 성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우리를 섬기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없이는 예수회는 이냐시오가 설립한 예수님의 이름을 딴 수도회가 더 이상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성모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분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함합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당신 아드님 곁에 두셨고” 예수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배웠던 성모님에 대한 사랑은 제 삶 전체에서 자라왔고 그 사랑은 아이다운 천민난만한 성격을 잃지 않았습니다. 제가 열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던 때부터 말입니다. “페드로, 넌 성인 같았던 엄마를 잃었다. 하지만 천상에 더욱 성인 같으신 엄마가 계시다.” 이 체험은 결코 잊지 못할 순간이었으며 참으로 선량하셨던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입니다. 


예수회 입회 50주년을 갈음하는 지금 저는 집회서의 말씀을 입술 위에 올리고 싶습니다. “임금이신 주님, 당신께 감사를 드리고 저의 구세주 하느님이신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보호자요 협조자가 되시었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51:1-2) 그리고 저는 삼가 성모님께 그분이 마니피캇에서 하셨던 말씀을 빌려 말하는 것을 허락해주길 청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냐시오 성인이 영적 일기에 남긴 기도문, 제 자신의 깊은 약함을 느끼며 드리는 기도문으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시편 130,1)). “영원하신 성부여, 저를 굳세게 하소서. 영원하신 성자여, 저를 굳세게 하소서. 영원하신 성령이여, 저를 굳세게 하소서. 거룩하신 성삼위여, 저를 굳세게 하소서. 저의 한분이신 하느님, 저를 굳세게 하소서.” 

 

(번역 : 예수회 김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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