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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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특별기획 1탄] 페드로 아루페 (Pedro Arrupe, SJ) 신부의 삶

2020.01
0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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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아루페, SJ (1907-1991)

 

제 28대 예수회 총장을 지낸 페드로 아루페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새로운 방식으로 전 세계 사람들과 교회를 섬겨야 하는 현실 속에서 예수회를 이끌었다. 

그는 일생을 바쳐 사회 정의에 투신 하였으며,

훌륭한 영적 깊이를 지닌 사람으로 많은 이들의 기억 안에 큰 영감으로 자리 잡았다.

 

초기

페드로 아루페 신부는 1907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났다. 수 년 간 의사로서 교육 받았던 그는 1927년 예수회에 입회한다. 1931년 스페인 정부가 예수회를 추방한 뒤, 아루페는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을 거쳐 연학을 이어갔다. 사제 서품 뒤 아루페 신부는 1938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평생 그 곳에서 선교사로 일하기를 희망했다.

 

체포 및 구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폭격 이후 일본 보안군이 아루페 신부를 간첩 협의로 체포했다. 그는 독방에 갇혔다. 훗날, 아루페는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그 자신이 겪었던 가난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대부분의 나날 동안 성찬 전례를 거행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 속에서 아루페는 특별한 은총의 순간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1941년 크리스마스 밤, 아루페 신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의 독방 근처에 모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을 볼 수 없었던 그는 처형의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마음 속에 불평과 절망의 소리가 가득한 그 때, 나는 나의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가르쳐주었던 노래 중 하나인 부드럽고 달콤하고 위안이 되는 캐롤을 들었습니다. 나는 내 북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힐 위험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던 나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Pedro Arrupe: Essential Writings, Kevin Burke, Maryknoll, NY: Orbis Books 2004, p. 57)

 

노래가 끝나고 몇 분 후, 아루페는 성탄 전례를 통해 십자가에서 내려와 제단으로 향하실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했다고 한다. 

“나는 그분께서 내 마음 속으로 내려오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내 모든 생을 통틀어 최고의 영성체를 경험했습니다.” (같은 책. p. 58)

 

33일이 지난 후 일본 헌병이 그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오자, 아루페는 그들이 자신을 처형하러 온 것이라 확신했다. 감옥에서의 경험 이후 그는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서 오는 내적 평온으로 가득 찼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아루페는 히로시마 외곽의 나가츠카로 이동하여 일본 미션의 수련원장으로서 사도직을 수행했다. 1945년 8월 6일, 그는 미국의 B-29폭격기 한 대가 도시를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고 이어서 공습 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또 다른 사이렌이 곧 울릴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는 곧 사이렌 소리가 아닌 엄청난 폭발음을 들었다. 숙소 문과 창문이 부서졌고 그는 뇌진탕을 일으켰다.

 

부상자들에 대한 사목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에서 아루페 신부는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해 그가 배운 의술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150명 이상의 희생자들을 돌보았다. 당시 방사능의 위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그들은 외적인 상해가 전혀 없어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며 당혹감과 괴로움을 느꼈다. 아루페와 동료들은 아주 기초적인 음식과 의료품만으로 마취제나 현대적인 약물도 없이 사람들을 돌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보고 있었던 150명의 사람들 중 단 한 명의 소년 만이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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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발견하다.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예수회 관구를 방문했을 때, 페드로 아루페 신부는 그 지역에서 가장 가난한 교외 빈민가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아루페는 그 지역 사람들이 세심하고 정성을 다 해 미사를 드리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성찬 전례 가운데 사람들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들을 보며 성체를 나누어 주던 그의 손이 떨렸다고 전했다.

그 후, 특별히 어떤 큰 몸집의 사내가 아루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의 집은 반쯤 부서진 판잣집이었다. 그 사내는 구부러진 의자에 아루페를 앉히고 자신과 석양을 보자고 초대했다.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다 본 뒤, 그 사내는 아루페 신부가 그 지역 공동체에 가져다 준 것들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하며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을 선물로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가진 유일한 선물은 바로 아름다운 석양을 함께 바라볼 기회였던 것이다.

 

페드로 아루페 신부는 그 순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내게 손을 건네 주었습니다. 그 곳을 떠나면서, 나는 이와 같은 친절한 마음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회 총장

페드로 아루페 신부가 1965년 예수회 총장으로 선출될 때, 그는 예수회 일본관구의 관구장을 지내고 있었다. 그는 1983년까지 예수회 총장으로서 일했다.

 

28대 예수회 총장으로서 페드로 아루페에게 주어진 임무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생겨난 큰 변화에 따라 예수회를 이끄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회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를 대면하고 헌신하도록 하는 일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그의 지향은 1975년 제 32차 총회문헌에서 “오늘날 우리의 사명 : 신앙의 봉사와 정의 구현” 이라는 교령으로 통과되었다. 이로 인해 예수회는 특별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실질적인 투신을 하게 되었다. 1989년 엘살바도르에서 6명의 성직자들이 살해당하는 등 여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회는 페드로 아루페의 지원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연대하며 정의 구현을 위한 활동을 계속 했다.

 

정의에 대한 페드로 아루페의 신념은 예수회 교육의 목표를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의 주된 교육 목표는 ‘타인을 위한 사람(men and women for others)’을 양성해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한 사람’이란 곧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위해, 온 세상을 위해 사셨고 돌아가신 사람이었던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최소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지 않고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 타인을 위한 정의로서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가식이라 확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Pedro Arrupe: Essential Writings, Kevin Burke, Maryknoll, NY: Orbis Books 2004, p. 173)

 

뇌졸중과 그의 사임

1981년 쇠약해진 페드로 아루페는 뇌졸중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명으로 임명된 이가 1983년 페드로 아루페의 사임 전까지 임시 총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제 33차 총회 개회식에 휠체어에 타고 참여했고, 페드로 아루페 신부의 마지막 기도가 총회에서 대독되었다.

[주: 당시 페드로 아루페는 뇌졸증 후유증으로 언어능력이 손상된 상태였음.]

 

이제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것이 제가 어릴 때부터 평생을 바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차이를 보게 됩니다.

이제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저 자신이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느낀다는 것은

참으로 심오한 영적인 체험입니다.

 

페드로 아루페 신부는 1991년 2월 5일 선종하였다.

 

[이 기사는 로욜라 프레스(Loyola Press)가 운영하는 www.ignatianspirituality.com에  게재된 페드로 아루페의 생애에 대한 Jim Campbell의 기사의 번역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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